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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

ѰԽù 46

신화와 전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구전(口傳)으로 변형된 사실(史實)이다. 선사시대에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까마득한 옛날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의 설화를 신격화한 것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이 우리나라의 개국신화가 된 것도 그렇고, 문자가 없던 아메리카 인디언이 구전으로 부족의 역사를 전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신화가 없고, 일본의 건국신화라는 것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신화를 훔쳐간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인도·이집트·이란·이스라엘·그리스·로마 등 수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나라와 민족치고 신화 없는 나라가 없다. 그래서 신화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교훈을 준다.

세계의 여러 신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신화는 그리스 · 로마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신화는 수메르·앗시리아 등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민족신화와 더불어 서양 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시지포스는 바로 이 그리스신화에 나온다. 시지포스는 당당한 신화의 주인공이지만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용기와 의지를 보여주었다. 산꼭대기를 향해 커다란 바윗덩이를 쉴 새없이 밀어올리는 고역의 주인공, 이것이 운명에 도전하는 시지포스의 모습이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시지포스는 인간 가운데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여 능욕했다. 아이기나를 찾아다니던 아소포스를 만난 시지포스는 자기가 살고 있는 아크로코린토스에 샘물이 솟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이 사건의 내막을 알려주었다. 아소포스는 올림포스로 찾아가 제우스에게 따지고 들었으나 제우스가 벼락을 내려치는 바람에 강약이 부동이라 씩씩거리며 자기가 사는 강바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괘씸죄에 걸린 시지포스는 제우스에 의해 신들을 모독한 자들이 갇히는 음산한 지옥 타르타로스에서 끊임없이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올리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 시지포스는 제우스의 노여움보다 불의 혜택을 더 받고 싶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 시지포스가 죽기 전에 자기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보려는 주책없는 생각으로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매장하지 말고 들판에 내다버리라고 했다. 그의 아내는 시지포스가 시키는대로 그의 시체를 들판에 내다버렸다. 지옥에 떨어진 시지포스는 아내의 비인간적이고 고지식하며 무식한 복종에 화가 났다. 그는 아내를 벌주기 위해 다시 한 번 지상에 올라갔다 올 것을 지옥의 신에게 청해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이승에 돌아온 시지포스는 저승의 어둠과 고통 속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신들의 소환명령도 거역한 채 시지포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승의 삶을 즐겼다.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시지포스를 잡아오라고 시켰다. 헤르메스에게 목덜미를 잡혀 지옥으로 끌려온 시지포스의 앞에는 집채만큼 커다란 바윗덩이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부터 끝없는 고역이 시작되었다.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가까스로 바위를 굴려올리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에 못이겨 다시 그 뒷쪽 산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시지포스는 산밑으로 내려가 또다시 그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올려야만 했다.

제우스는 아마도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무한히 무익(無益)한 중노동에 처하는 것이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이 인간에게 내리는 가장 적합한 형벌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해도 달도 없는 공간,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밀어올린 바윗덩이가 순식간에 까마득한 골짜기 밑으로 굴러떨어질 때의 좌절감과 비애를 그 누가 이해하랴. 다시 돌을 밀어올리기 위해 하산하는 시지포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발견할 수 있다. 시지포스는 산밑으로 내려갈 때마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고 말겠다!`는 신념을 다졌을 것이다.

이처럼 운명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현세의 고통과 맞서 쉴 새없이 싸우는 시지포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태생적 숙명을 보게 된다. 시지포스가 신들에게 반항해도 결국은 붙잡히고 말았듯이, 인간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의 행진을 시작해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가 아닌가. 하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산꼭대기까지 굴려올려도 다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정신, 좌절과 패배를 딛고 꿈의 성취를 위해 재도전하는 불굴의 정신, 그 비장한 시지포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화를 넘어선 인간 정신의 위대성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한 삶은 누구에게나 괴롭지만, 이 세상은 온갖 고통과 맞서 싸우면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황원갑(소설가 · 한국풍류사연구회장) > 입력시간 : 2002/10/11 17:54
출처 : 서울경제신문  http://ww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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