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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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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신화 현장을 가다] (상) ‘불뿜는 늑대’영웅 이아손’ 나그네 童心 깨워

3년전인 1999년 11월1일, 문화일보 창간(8주년)을 맞아 연재되기 시작한 소설가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기행 ‘새천년을 여는 신화 에세이’는 한국사회에 신화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후 신화에세이 연재는 장장 1년동안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진행되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웅진닷컴)란 책으로 나왔다.

곧바로 책은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100만부 판매를 눈앞에 둘 정도가 됐다. 이씨는 문화일보 연재 시작 3년만인 지난 9월26일부터 10월3일까지 또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 현장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그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보내 당선된 독자들과 함께였다. 3년만에 다시 찾은 그리스 로마 신화 현장. 이씨의 글과 사진작가 심환근씨의 사진으로 3회에 걸쳐 다시 본다.


# 이스탄불의 ‘흐린 주점’에서



나는 지금 약간 흥분해 있다. 나의 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독자들과 함께 그리스 로마 신화의 현장인 그리스 전역과 이탈리아를 둘러보고 온 직후, 나는 조지 아시마코풀로스 주한 그리스 대사의 초대를 받고 저녁을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뿐만 아니다. 3년전인 1999년 11월부터 나의 글 ‘새 천년을 여는 신화 에세이’를 근 1년 동안, ‘한국 신화 기행’을 반년 가까이 실어준 문화일보에 다시 글을 써보내는 영광을 누린다.

한 신문사로부터, 3년 내리 연재(이번에는 아주 짧지만)의 지면을 열어주는, 이 정도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면 작가는 가볍게 들뜨는 특권을 누려도 좋을 것 같다. 약간 들뜬 김에 대뜸 회고조로 뒤돌아보는 것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1998년 1월의 어느 비오는 날, 나는 터키의 옛수도 이스탄불의 한 주점에 앉아 있었다. 흑해가 바라다보였다. 흑해의 물빛은 여느 바다에 견주어 조금 더 검다. 소금기가 여느 바닷물보다 많기 때문이란다. 신화시대 사람들에게 흑해는 공포의 바다, 죽음의 바다였다.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이 이끄는 아르고 원정대가 이 바다를 열기까지, 이 흑해를 통과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쉼플레가데스(충돌하는 두 바위섬) 때문이었다. 쉼플레가데스는 흑해의 관문 노릇을 하던 거대한 두개의 바위섬이다.

해협으로 배가 들어오면 맹렬한 속도로 서로 접근해 충돌, 그 사이에 들어온 배를 깨뜨렸다는 두개의 바위섬이 바로 쉼플레가데스다. 아르고 원정대는 머나먼 북쪽 나라 콜키스로 가자면 이 바위섬 사이를 지나야 했다.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이아손은 두 바위섬 사이로 비둘기를 날렸다. 두 바위섬이 서로 충돌해 비둘기를 터뜨리고 물러서는 순간 이아손은 그 사이로 배를 몰아넣음으로써 인류로서는 처음으로 흑해를 항해할 수 있었다.

이아손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쉼플레가데스는 어떻게 되었던가. 충돌하는 바위섬 노릇을 그만두고 여느 섬처럼 해협에 뿌리를 내렸다. 이아손이 흑해를 지나 먼 북쪽 나라 콜키스로부터 가져왔던 것이 그리스인의 자존심인 ‘금양모피(金羊毛皮)’였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스탄불의 ‘흐린 주점’에서 흑해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삶 속의 흑해와 쉼플레가데스를 생각했다. 흑해를 건너지 않고는 나의 콜키스에 이를 수 없다. 바로 그날 그 흐린 주점에서 내 삶과 미지의 땅 사이에서 나를 기다리는, 충돌하는 두 개의 섬을 향해 배를 몰아넣기로 결심했다. 준비에만 1년 반이 걸렸다. 1999년 8월 당시 미국에 머물고 있던 나는 아내와 둘이서 유럽으로 떠났다. 넉대의 카메라가 동행했다.

3개월 동안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신화 관련 도판 자료를 모으고, 신화 유적이나 유물은 카메라에 담았다. 문화일보가 연재 지면을 열어준 것은 1999년 11월, EBS(교육방송)가 시리즈 방송 강의 시간대를 편성해준 것은 다음해인 2000년 5월이었다. 6월에는‘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권을, 2002년 2월에는 2권을 펴냈다. 크게 격려를 받았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출판사가 이 책의 판매부수 100만부를 목전에 두고 독후감을 모집한다고 한 것은 지난 8월의 일이다. 지난 9월 말에서 10월초에 걸쳐 나와 함께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온 독자들은, 그러니까 독후감 공모에 당선된 사람들, 신화 관련 서적을 상당수 독파해낸 사람들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내가 가볍게 들떠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3, 4년전 때로는 홀로, 때로는 아내와 함께 헤집고 다니던 남유럽 신화시대 돌무더기 사이로 난 길을, 이번에는 24명의 젊은 독자와 동행한 것이다.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느낌이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그때의 흥분을 과장하지는 않겠거니와, 감추려고도 하지 않겠다. 나는 그들에게 주문했다. 돌덩어리 다듬은 연대 같은 것을 따지는 일, AD나 BC를 따지는 일을 소임으로 삼지 말 것을 주문했다. 가슴으로 신화시대의 이미지를 만나면서 그 사이에다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놓을 것을 주문했다. 나는 아득한 옛날에 쓰여진 이 신화를,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인류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화를 ‘이야기의 어린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어린이는 예사 어린이가 아니다. 어른들의 상상 속에서는 늘 아버지 행세를 할 수 있는 그런 어린이다. 나는 워즈워스의 시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를 읽을 때마다 신화를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주유소 로고(상표)가 있었다. 단순한 붓질로 그린, 불을 뿜는, 다리가 여섯개인 늑대 그림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유학생에게 물어보았다.

“저 육각토화랑(六脚吐火狼)의 내력을 설명해줄 수 있어요?”

나는 ‘다리가 여섯개인, 불 뿜는 늑대’를 농삼아 ‘육각토화랑’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안내인은 이 괴상한 이름이 그 상표의 진짜 이름이기라도 한 듯이 단박에 알아듣고는 설명했다.

“아지프(AGIP)라는 정유회사가 상표 도안을 공모했답니다. 아지프는 한국의 SK나 LG처럼 큰 정유회사입니다. 한다 하는 디자이너들이 출품했을 테지요. 그때 당선된 작품이 바로 저 늑대 그림이랍니다. 불을 뿜는 검은 늑대. 정유회사 로고답잖아요. 어디에 가든지 눈에 제일 잘 띕니다. 도안이 단순하면서도 설득력이 있고요. 놀라운 것은 저 로고를 출품한 사람은 유명 디자이너가 아닌, 열살짜리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소년이 꿈에서 본 이미지를 단순한 붓질로 그렸다는군요. 더 놀라운 것은, 소년은 그려냈을 뿐 그도 저 이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독자들 앞에서 설명을 시도해 보았다. 나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내가 시도하는 나의 설명일 뿐, 독자들 몫은 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신화 해석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불 뿜는 짐승을 곧잘 상상한다. 아지프의 로고를 그린 소년은 그림책에서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불 뿜는 괴물 키마이라를 보았을 수도 있고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동양의 용은 대개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서양의 용은 대개 불을 뿜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서양문화의 고향 중의 하나인 이탈리아의 소년이 불 뿜는 동물을 그린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탈리아인의 조상이 누구인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로마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로물루스와 레무스다. 로마라는 나라 이름도 이 쌍둥이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탈리아에는 늑대의 젖을 빠는 쌍둥이 그림이나 청동 돋을새김이 흔하다. 이탈리아인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카피톨리움 언덕에는 이 쌍둥이의 거대한 청동상이 있다. 청동상은 검다.

멀리서 보면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쌍둥이 형제의 모습이 흡사 늑대의 다리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는, 불을 뿜는, 다리가 여섯개인 늑대의 이미지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열살짜리 소년의 상상력이 유명 디자이너들을 일거에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린이의 상상력이 막강한 신화 이미지의 압축 파일과 함께 용출했기 때문이 아닐 것인가. 나는 신화를 그렇게 읽는다.

신화는 흑해 너머에서 내가 수습해온 나의 금양모피다.



/이윤기
2002.11.1 10:08PM
http://www.munhwa.co.kr/culview.html?gisaid=2002110101012430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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